2장 · 쓰고, 굳히고, 읽는다
어릴 적 전화번호가 몇 년이 지나도 남아 있다는 것은, 한때 그 번호도 갓 받은 번호처럼 작업공간에 잠깐 떠 있던 시절이 있었다는 뜻이다. 그때는 그것도 몇 초만 한눈을 팔면 흩어졌을 것이다. 그런데 지금은 장기기억에 박혀 오래 견딘다. 좁고 휘발하는 작업공간에 잠깐 떠 있던 것이, 어떻게 넓고 오래가는 장기기억의 항구적 항목이 되었나. 그 길에 쓰고, 굳히고, 읽는 세 과정이 놓인다.
쓰기 · 작업공간에서 장기기억으로
장기기억으로 넘어가는 길의 첫머리는 작업공간에서 지은 것을 장기기억에 새 기록으로 적는 일이다. 이것을 인코딩(encoding)이라 부른다. 작업공간에서 처리된 것이 장기기억에 자리를 얻는 순간이 인코딩이고, 학습이라 부르는 일의 출발점이 여기다.
인코딩에서 먼저 짚어 둘 것은, 적히는 것이 입력의 사본이 아니라는 점이다. 같은 이름을 두 사람이 들어도, 한 사람은 그것을 자기가 아는 누군가와 같은 이름이라 엮어 두고, 다른 사람은 소리만 흘려듣는다. 며칠 뒤 앞 사람은 이름을 떠올리고 뒷사람은 못 떠올린다. 두 사람의 귀에 들어온 소리는 똑같았는데, 장기기억에 적힌 것은 달랐다. 무엇이 얼마나 적히느냐는 작업공간에서 그 입력을 이미 아는 것들과 얼마나 엮었느냐가 정한다. 작업공간에서 깊이 처리해 많이 엮으면 장기기억에 풍부하게 적히고, 표면만 스치면 엷게 적히거나 적히지 않는다. 인코딩은 입력을 그대로 베끼는 복사가 아니라, 작업공간의 연산 결과를 장기기억에 새겨 넣는 일이다.
굳히기 · 갓 쓴 것을 안정시키기
적고 난 뒤에 오는 것은 갓 적힌 기록을 시간에 걸쳐 단단하게 만드는 일이다. 이것을 응고화(consolidation)라 부른다. 인코딩이 막 새겨 넣은 기록은 아직 무르다. 무른 까닭은 그것이 기존 지식과 아직 느슨하게만 이어져 있어서다. 매단 줄이 몇 가닥뿐이라, 비슷한 것이 뒤이어 들어와 같은 자리를 차지하려 하면 쉽게 밀려난다. 시험 전날 밤 벼락치기로 욱여넣은 것이 다음 날 아침이면 군데군데 무너져 있는 경험이 이 무름이다. 응고화는 시간을 들여 이 기록을 기존 지식에 더 촘촘히 이어, 여러 갈래로 붙들리게 한다. 매단 줄이 많아지면 비슷한 것이 들어와도 그 자리를 빼앗아 덮어쓰기 어렵다.
응고화에는 다른 두 과정과 다른 점이 하나 있다. 우리가 의도하고 돌리는 연산이 아니라, 작업공간이 빈 틈을 타 저절로 진행된다는 것이다. 쓰기도 읽기도 표상을 작업공간에 올려 그 자리를 차지하며 벌이는 일이지만, 굳히기는 그 자리가 새 일로 차 있지 않을 때 틈틈이 이뤄진다. 그래서 우리가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일어나고, 작정한다고 빨라지지도 않는다. 작업공간이 비어 있고 새 입력도 안 들어오는 때, 곧 잠든 동안이 굳히기에 가장 좋은 시간이다. 깨어 활동하는 동안에는 새 입력이 끊임없이 들어와 작업공간을 채우고 갓 쓴 것을 밀어내지만, 자는 동안에는 그 방해가 없어 조용히 다질 수 있다. 그래서 굳히기의 상당 부분이 수면 중에 일어난다고 여러 연구가 가리킨다. 잘 자고 난 뒤에 전날 배운 것이 외려 또렷해지는 까닭이 여기 있다.
읽기 · 장기기억에서 다시 작업공간으로
마지막은 장기기억에 든 기록을 다시 작업공간으로 불러오는 일이다. 이것을 인출(retrieval)이라 부른다. 아는 사람 이름이 입에 오르는 것, 외운 시 한 구절이 떠오르는 것이 전부 인출이다. 장기기억에 적힌 것을 읽어 작업공간에 올리는 일이 인출이고, 우리가 '기억난다'고 느끼는 순간이 이것이다.
인출에는 겉보기와 다른 면이 하나 있다. 읽기는 그저 꺼내 보는 수동적인 일처럼 보이지만, 무언가를 장기기억에서 힘껏 끌어내는 그 행위 자체가 장기기억을 바꿔 놓는다. 한 번 떠올린 것은 다음에 더 잘 떠오른다. 꺼내 읽는 일이 동시에 다시 쓰는 일이기도 한 것이다. 백지 시험이 다시 읽기보다 잘 남는 까닭이 이 한 가지 사실에서 나오는데, 그것을 제대로 펼치려면 장기기억의 구조부터 세워야 한다.
학습이란 무엇인가
세 과정을 늘어놓고 보면, 학습이 무엇인지를 한 줄로 못 박을 수 있다. 학습이란 작업공간의 연산이 장기기억의 상태를 바꾸는 일이다. 갓 받은 전화번호가 어릴 적 번호처럼 오래 남는 번호가 되는 것은, 작업공간에서 그 번호를 처리한 결과가 인코딩과 응고화를 거쳐 장기기억에 항구적 변화로 남았기 때문이다. 무언가를 배웠다는 것은 머릿속 어딘가에 좋은 느낌이 생겼다는 뜻이 아니라, 장기기억의 상태가 실제로 달라졌다는 뜻이다.
앞으로 다룰 모든 학습법은 결국 이 한 줄의 변주다. 그런데 이 정의에는 아직 빈 곳이 있다. 작업공간의 연산이 장기기억의 '상태'를 바꾼다고 했는데, 그 상태가 정확히 무엇인가. 장기기억에는 무엇이 어떤 모양으로 저장되어 있고, '상태가 바뀐다'는 것은 그 안에서 무엇이 달라진다는 말인가. 쓰기와 읽기가 무엇을 어떻게 바꾸는지 말하려면, 바꾸는 대상인 장기기억의 생김새부터 알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