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장 · 수 개의 슬롯

낯선 숫자 열 자리를 한 번 듣고 그대로 외워 보라고 하면 대부분 중간에서 무너진다. 그런데 같은 열 자리라도 그것이 익숙한 전화번호 꼴로 끊겨 있으면 한결 수월하다. 작업공간에 한 번에 올려 둘 수 있는 것은 많아야 한 줌이고, 그 한 줌을 넘어서면 새것을 들이는 만큼 옛것이 밀려난다. 작업공간의 첫째 한계는 이 좁음이다. 정확히 몇 개까지인지는 사람마다 다르므로 숫자로 못 박지 않겠지만, 그 수가 손에 꼽을 만큼 적다는 것은 분명하다. 머리로 하는 거의 모든 일이 여기서 병목을 만난다.

같은 한 줌, 다른 적재량

좁다는 것이 곧 다룰 수 있는 정보가 적다는 뜻은 아니다. 작업공간이 드는 단위는 표상이고, 앞에서 본 대로 한 표상이 담는 정보의 양은 고정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같은 한 줌의 슬롯이라도, 거기에 얕은 표상을 얹느냐 깊이 합성된 표상을 얹느냐에 따라 실어 나르는 양이 천양지차로 갈린다.

낯선 열 자리 숫자는 열 개의 따로 노는 표상이라 한 줌을 금세 넘기지만, 그것이 익숙한 번호 꼴이면 두어 덩어리로 묶여 한 줌 안에 든다. 같은 정보가 슬롯을 적게 차지하는 것은 그것이 이미 한 단위로 묶여 있어서다. 3장에서 본 연결망으로 말하면, 깊이 합성된 표상 하나는 그 아래 위계 전체를 한 슬롯에 압축해 싣는다. 그래서 하위 표상을 더 깊이 묶어 두는 일이 곧 작업공간의 적재량을 넓히는 길이 된다. 전문가가 초보와 똑같이 좁은 작업공간으로 훨씬 많은 것을 다루는 까닭이 이것이다. 슬롯의 수가 더 많아서가 아니라, 한 슬롯에 더 깊은 합성 표상을 얹기 때문이다. 좁음은 똑같고, 그 좁은 자리에 무엇을 얹느냐가 다르다.

깊이를 타고 불어나는 비용

이 적재의 차이가 이해의 성패를 가르는 장면이 글 읽기에 있다. 한 문장의 의미를 세운다는 것은 글자에서 단어로, 단어에서 구로, 구에서 문장 의미로 표상을 위로 쌓아 올리는 일이다. 위층 표상을 묶으려면 그 재료인 아래층 표상들이 작업공간에 한 단위씩 떠 있어야 한다.

여기서 갈림이 생긴다. 아래층 재료가 반복으로 충분히 묶여 있는 독자에게는, 그 재료가 한 슬롯짜리 단위로 곧장 인출돼 올라온다. 단어를 보면 그 의미가 한 덩어리로 떠오르고, 익숙한 구는 통째로 한 단위가 된다. 그러면 작업공간에는 최상위 묶기에 쓸 재료 몇 개만 떠 있으면 되니, 문장 의미를 세우는 일이 값싸게 끝난다. 그러나 아래층 재료가 묶여 있지 않은 독자는 사정이 다르다. 단어 하나의 의미부터 그 자리에서 더 아래 재료로부터 추론으로 지어 올려야 하고, 그 아래 재료마저 갖춰져 있지 않으면 한 층 더 내려가 짓는다. 작업공간이 좁아 이 재료를 한꺼번에 펼쳐 둘 수는 없으므로, 짓기는 아래에서 위로 하나씩 순차로 이뤄진다. 하위 표상 하나를 지어 한 단위로 접고, 그것을 붙든 채 다음 하위 표상을 짓고, 그렇게 모인 단위들을 위층에서 묶는다.

문제는 먼저 지어 둔 단위가 다음 것을 짓는 사이에 흐려진다는 데 있다. 작업공간에 든 것은 붙들지 않으면 몇 초 만에 새어 나가는데, 다음 재료를 짓느라 손이 그쪽으로 가 있는 동안 먼저 지은 것은 붙들리지 못해 자리에서 밀려난다. 위층 묶기에 필요한 재료가 다 모이기도 전에 먼저 지은 것이 이렇게 빠져나가면, 그것을 다시 지어 올려야 한다. 그런데 다시 짓는 데에도 같은 작업공간이 드니, 그러는 사이 또 다른 것이 밀려난다. 지을 재료가 많고 깊을수록 이 되돌이가 잦아져, 끝내 최상위 묶기에 필요한 재료가 동시에 다 떠 있는 순간이 오지 않는다. 그러면 문장 의미라는 맨 위 표상이 끝내 닫히지 못한다. 글자는 다 읽었는데 무슨 말인지 이해가 서지 않는 상태가 바로 이것이다. 게을러서도, 집중을 안 해서도 아니라, 좁은 작업공간에서 지어야 할 재료가 너무 많아 먼저 지은 것이 뒤엣것을 짓는 사이 무너졌기 때문이다.

배경지식이 이해를 가르는 자리

이로써 같은 글이 누구에게는 쉽고 누구에게는 불가능한 까닭이 설명된다. 두 독자의 작업공간은 똑같이 좁다. 슬롯의 수는 다르지 않다. 다른 것은 아래층 재료가 이미 한 단위로 묶여 있느냐다. 배경지식이 있는 독자에게는 재료마다 한 슬롯이면 되어 작업공간에 여유가 남고, 최상위 묶기만 하면 되니 이해가 비교적 쉽다. 배경지식이 없는 독자에게는 같은 글이 재료를 일일이 지어 올려야 하는 일이 되어, 작업공간이 그 짓기로 꽉 차고 먼저 지은 것이 무너져 최상위 묶기가 닫히지 못한다. 그래서 무언가를 깊이 합성해 두는 일은 단지 아는 것을 늘리는 데 그치지 않고, 그 위에 더 높은 것을 세울 수 있는 작업공간의 여유를 마련하는 일이다. 가진 것이 많을수록 새것을 얹을 자리가 더 많이 생긴다.

작업공간의 좁음이 이렇게 큰 차이를 만든다. 그런데 좁음은 작업공간의 한계 가운데 하나일 뿐이다. 한 번에 몇 개를 들 수 있느냐와는 별개로, 그 든 것들 위에서 한꺼번에 얼마나 많은 연산을 굴릴 수 있느냐는 또 다른 한계다. 그리고 앞서 본 세 연산은 저마다 따로 노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살림을 나눠 쓴다. 다음은 그 살림의 이야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