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장 · 거짓 계기판과 모델의 바깥
앞 부의 끝에서 본 대로, 학습자는 자기 장기기억이 실제로 바뀌었는지를 직접 들여다보지 못한다. 여기까지 이 모델은 학습자가 과제에 매달리는 동안 머릿속에서 일어나는 처리를 그려 왔지만, 정작 그것을 굴리는 학습자 자신은 모델의 가장자리에 남는다. 학습자는 제 상태를 직접 못 읽고, 애초에 그 일에 관여해야 하며, 같은 시간을 들여도 그 안에서 무슨 처리가 일어났느냐가 결과를 가른다.
거짓 계기판
먼저, 학습자가 제 머릿속에서 읽어 낼 수 있는 것이 무엇인가. 한 표상의 저장강도는 의식에 떠오르지 않는 숨은 값이다. 학습자가 실제로 감지하는 것은 단 하나, 어떤 항목이 작업공간에 얼마나 수월하게 떠오르는가다. 술술 떠오르면 잘 아는 것 같고 더듬거리면 모르는 것 같은, 이 수월함의 느낌을 유창성이라 한다. 무엇을 알고 모르는지, 더 공부할지 그만둘지를 학습자는 이 유창성 하나로 가늠한다.
문제는 이 유일한 계기판이 정작 재야 할 것을 재지 못한다는 데 있다. 유창성이 비추는 것은 그 순간의 인출강도이지, 학습으로 남을 저장강도가 아니다. 둘은 따로 자라므로, 수월하게 느껴지는 그 순간이 저장강도는 거의 자라지 않는 순간일 수 있다. 게다가 인출강도는 장기기억으로 가는 길이 트여서만 높아지는 것이 아니라, 방금 본 외부 입력이 그 항목을 작업공간에 띄워 주기만 해도 높아진다. 한 실험이 이를 드러낸다. 사람들에게 글을 읽히고 나중에 받을 시험 점수를 예측하게 했는데, 글의 의미는 그대로 두고 일부 글자만 흐릿하게 지웠다 되살리는 조작만으로 그 예측이 출렁였다. 내용이 같아 배울 양도 같은데, 읽는 동안의 수월함이 달라지자 '얼마나 배웠나'의 판단이 따라 움직인 것이다. 계기판은 머리에 남은 것이 아니라 읽는 동안의 매끄러움을 읽고 있었다.
그래서 다시 읽기는 위험하다. 다시 읽기는 외부 입력으로 항목을 띄워 인출강도를 잠깐 올리고, 계기판은 그 수월함을 '안다'로 읽는다. 저장강도는 거의 안 자랐는데도 '이만하면 됐다'며 정작 효과가 큰 힘든 인출을 건너뛴다. 더 고약한 것은 이 어긋남이 한 방향으로 체계적이라는 점이다. 유창성을 끌어올리는 행동, 곧 다시 읽기나 몰아치기는 저장강도를 거의 못 키우고, 저장강도를 가장 크게 키우는 행동, 곧 덮고 떠올리기나 나눠 익히기는 인출강도가 떨어진 자리에서 일어나 그 순간 버겁게 느껴진다. 두 사실을 겹치면, 가장 잘 배우는 방법일수록 그 순간에는 가장 비효율적으로 느껴진다. 학습자가 제 느낌을 곧이곧대로 따를수록 더 나쁜 방법에 안주하게 되는 구조다.
자료를 덮고 제 힘으로 꺼내 낼 수 있는가, 이것만이 저장강도의 실제 상태를 드러낸다. 자기 학습을 조절하는 일의 핵심은 유창성을 의심하고 그 자리에 인출 시험을 놓는 것, 곧 '읽으니 알 것 같다'를 '덮고도 나오는가'로 바꾸는 것이다.
관여의 문
다음 자리는 모델이 작동하기 위한 전제다. 아무리 좋은 처리도 학습자가 그 일을 시작하고 버텨 내야 비로소 일어난다. 힘든 인출이 저장강도를 키우는 것도 학습자가 그 힘듦을 견디며 떠올릴 때의 이야기이고, 깊은 합성이 상황모델을 세우는 것도 그만큼 매달릴 때의 이야기다. 관여하지 않으면 모델의 어떤 부분도 작동하지 않는다.
이 문을 여는 것이 동기인데, 동기를 들여다본 연구들은 그것이 어디서 오느냐에 따라 갈린다고 본다. 흥미나 스스로 인정한 가치에서 비롯한 자율적 동기가, 외부의 압력이나 보상에 떠밀린 동기보다 성취 및 끈기와 더 강하게 이어진다는 것이 여러 자료가 같은 방향으로 가리키는 바다. 그리고 그 자율적 동기를 떠받치는 가장 강한 기둥으로 꼽히는 것이 유능감, 곧 '내가 이걸 해낼 수 있다'는 지각이다. 해낼 만하다고 느낄 때 학습자는 어려움을 견디고, 거듭 실패해 유능감이 무너지면 흥미도 끈기도 함께 사그라든다.
여기서 동기는 앞서 본 인지 처리와 맞물린다. 어려움이 배움에 이로우려면 학습자가 필요할 때 도움을 받아서라도 끝내 성공시킬 수 있어야 한다. 그 경계를 넘어선 난이도는 두 번 해롭다. 너무 어려워 인출에 실패하면 강화할 경로를 못 만든다는 점에서 인지적으로 해롭고, 거듭된 실패가 유능감을 깎아 관여 자체를 끊는다는 점에서 동기적으로도 해롭다. 그래서 난이도를 학습자 수준에 맞추는 일은 인지 변수인 동시에 동기 변수다. 바람직한 어려움의 그 좁은 띠는, 가장 잘 배우는 구간이자 학습자가 계속 매달릴 수 있는 구간이기도 하다.
양이 아니라 종류
마지막 자리는 이 처리 구조가 사람들 사이의 실제 실력 차이를 얼마나 설명하느냐다. 여기에는 널리 퍼진 믿음이 있다. 충분히 오래 연습하면 누구나 잘하게 된다, 한 분야에 만 시간을 쏟으면 전문가가 된다는 이야기다. 들인 시간이 결정한다니 공평하고 희망적으로 들린다.
그러나 같은 한 시간이라도 그 안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는 천차만별이다. 자기가 잘 못하는 자리를 골라 버겁게 매달리는 연습과, 이미 잘하는 것을 편하게 되풀이하는 연습은 전혀 다른 결과를 낳는다. 이 책의 언어로는, 편하게 되풀이하는 연습은 인출강도가 이미 높은 것을 또 인출하는 일이라 시간을 채울 뿐 저장강도를 못 키우고, 못하는 자리에 버겁게 매달리는 연습은 인출강도가 떨어진 자리에서 힘든 인출을 일으켜 저장강도를 키운다. 같은 한 시간이 한쪽은 헛돌고 한쪽은 남는다.
연습량이라는 잣대가 실력을 잘 예측하지 못하는 까닭이 여기 있다. 그 잣대는 시간의 길이만 잴 뿐, 그 시간에 어떤 처리가 일어났는지를 보지 못한다. 실제로 의도적 연습이 분야별 실력 차이를 얼마나 설명하는지를 종합한 분석을 보면, 그 몫은 분야에 따라 크게 출렁였다. 비교적 잘 짜인 게임이나 음악에서는 이십 퍼센트 안팎이었지만, 교육이나 전문직처럼 덜 구조화된 분야에서는 몇 퍼센트에 그쳤다. 연습이 중요하지 않다는 뜻이 아니라, 시간만 채우면 된다는 주장이 과장이라는 뜻이다. 성과를 가르는 것은 연습 시간의 양이 아니라, 그 시간에 일어난 처리의 종류다.
가장자리가 안을 가리킨다
이렇게 모델의 가장자리에 놓인 세 자리를 둘러보았다. 학습자는 제 상태를 직접 못 읽고, 애초에 관여해야 하며, 그 시간에 무슨 처리가 일어났느냐로 갈린다. 그런데 셋 다 결국 모델의 안쪽을 가리킨다. 자기 점검의 답은 느낌이 아니라 인출 시험, 곧 저장강도를 키우는 그 처리이고, 좋은 동기란 그런 처리에 계속 관여하게 하는 동기이며, 좋은 연습이란 저장강도를 키우는 처리가 일어나는 연습이다.
이렇게 모델의 안과 가장자리를 모두 둘러보았다. 남은 일은 흩어져 보이던 것들이 정말 하나의 모델에서 흘러나왔는지를 처음부터 끝까지 한 줄로 꿰어 보고, 이 모델이 무엇을 하라고 말하는지를 가려내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