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장 · 글귀와 상황

명제와 글귀의 연결망

글이 들어오면 작업공간은 문장을 명제로 바꾼다. 명제란 "민수가 우산을 두고 나왔다"처럼 대상들을 한 관계로 묶은 의미 한 토막이다. '민수'와 '우산'과 '두고 나오다'를 한 관계로 엮은 합성 표상 하나가 한 명제다.

명제들은 같은 대상을 다시 가리키는 곳에서 서로 이어진다. 앞 문장이 '우산'을 말하고 뒤 문장이 "그 우산은 빨간색이었다"고 받으면, 두 명제는 공유한 '우산'을 통해 연결된다. '우산'이라는 노드가 켜질 때 그것을 구성원으로 가진 두 명제가 함께 깨어나기 때문이다. 이렇게 글에 적힌 것만으로 명제들이 엮인 연결망을 텍스트베이스라 부른다. 글이 직접 말해 준 연결만 따라가면 되니, 따로 추론을 들일 필요가 없어 작업공간의 자원을 거의 쓰지 않고 값싸게 완성된다.

글귀를 넘어 상황으로

그런데 텍스트베이스는 '글이 말한 것'일 뿐, 그 글이 가리키는 상황 자체는 아니다. "민수가 우산을 두고 나왔다. 그날 오후 그는 흠뻑 젖어 돌아왔다"를 읽으면, 우리는 두 문장 사이에 적혀 있지 않은 것을 안다. 비가 왔고, 우산이 없어 비를 맞았다는 것. 글에는 '비'도 '젖은 까닭'도 적혀 있지 않다. 그 빈틈을 독자가 장기기억의 배경지식, 곧 우산은 비를 막고 비를 맞으면 젖는다는 지식을 끌어와 추론으로 메운 것이다.

이렇게 명제들을 서로, 그리고 장기기억에서 끌어온 배경지식과, 추론으로 만들어 낸 관계로 묶어 글이 비워 둔 빈틈까지 메운 통합 표상을 상황모델이라 부른다. 글이 그리려는 상황을 머릿속에 하나의 모델로 세운 것이다. 상황모델은 추론 경로의 합성을 글 전체에 걸쳐 수행한 산물이다. 텍스트베이스가 글에 적힌 명제를 얕게 이어 값싸게 끝난 것이라면, 상황모델은 배경지식까지 끌어들여 빈틈을 메우며 깊이 합성한 것이다. 자원도 그만큼 더 든다.

빈틈을 메우는 처리

빈틈을 추론으로 메운다고 했는데, 그 메우기 안에서 정확히 어떤 연산이 어떤 순서로 일어나는지를 한 빈틈에서 따라가 보자.

텍스트베이스 안에서 '우산을 두고 나왔다'와 '젖어 돌아왔다'는 '민수' 말고는 공유하는 노드가 없어, 둘을 잇는 까닭이 비어 있다. 이 빈틈이 작업공간을 장기기억으로 보낸다. 지금 켜진 표면 노드 '우산'과 '젖다'가 단서가 되어, 그것을 구성원으로 가진 표상을 장기기억에서 불러온다. '우산은 비를 막는다', '비를 맞으면 젖는다' 같은 표상이다. 이 인출이 두 명제를 이어 줄 다리 노드 '비'를 작업공간으로 끌어올린다.

다리가 올라오면 작업공간은 그것을 양쪽 명제와 새 관계로 묶는다. 비가 왔고, 막을 우산이 없었고, 그래서 젖었다. 빈틈 자리에 인과의 에지가 새로 지어져 끼워지고, 따로 놓여 있던 두 명제가 한 사슬로 통합된다. 이 인출과 형성이 빈틈마다 거듭되어, 글이 적지 않은 다리들까지 다 놓인 통합 표상이 상황모델이다.

그러니 텍스트베이스와 상황모델을 가르는 것은 처리다. 텍스트베이스는 글이 준 단서로만 명제를 잇고, 상황모델은 빈틈마다 장기기억을 인출해 새 에지를 형성한다. 즉, 이미 아는 관계로 묶는 추론을 글을 따라 되풀이한 것이 상황모델이다. 인출과 형성이 거듭되니 자원이 더 들고, 끌어올 배경지식이 없으면 다리가 올라오지 못해 빈틈은 메워지지 않는다. 그래서 우산과 비의 관계를 모르는 독자는 같은 글을 읽어도 텍스트베이스에 머문다.

한 걸음 더 나갈 수 있는가

한 표상이 무엇을 할 수 있는가는 그 안에 어떤 노드와 에지가 들었는가로 정해진다. 물음에 답한다는 것은 그 표상의 노드에서 활성을 따라가 답에 닿는 일이고, 닿을 노드도 따라갈 에지도 없으면 답은 나오지 않는다.

텍스트베이스에는 글이 적은 노드와, 글이 직접 이어 준 에지만 있다. 그래서 글에 적힌 것을 되짚는 데까지는 막힘이 없다. '민수가 무엇을 두고 나왔나'는 '민수' 노드에서 '우산'으로 난 에지를 따라가면 곧장 나온다. 글이 말한 것을 묻는 물음은 글이 깐 길 위에 답이 있다. 그러나 딱 거기까지다. '민수는 왜 젖었나'를 물으면 텍스트베이스 안에는 답이 없다. '비'라는 노드도, 우산 없음과 젖음을 잇는 인과의 에지도 글에 없었으니 텍스트베이스에 들어오지 못했고, 활성이 따라갈 길이 끊겨 있다. 텍스트베이스의 한계는 정확히 여기다. 글이 적은 것은 다 되짚되, 글이 적지 않은 것으로는 한 걸음도 못 나간다.

상황모델은 바로 그 한 걸음을 가능하게 한다. 빈틈을 메우며 끌어온 '비'와 새로 지은 인과의 에지가 모델 안에 들어와 있으니, '왜 젖었나'에 답할 길이 놓여 있다. 게다가 그 에지들은 장기기억의 배경지식에까지 박혀 있어, 글에 없던 새 상황과도 같은 배경 노드를 통해 이어진다. 그래서 상황모델을 세운 사람은 글이 말하지 않은 것을 추론하고, 배운 것을 새 상황에 적용한다. 추론도 적용도 결국 글 너머의 노드로 활성을 보내는 일인데, 그 너머로 난 길을 깔아 둔 것이 상황모델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두 산물의 쓸모는 묻는 물음에 따라 갈린다. '무엇이라고 했나'는 텍스트베이스로 답하고, '왜 그런가', '그렇다면 이 경우엔 어떤가'는 상황모델을 요구한다. 글귀를 다 외운 사람이 정작 한 걸음 나간 물음 앞에서 막히는 것은, 외운 것이 모자라서가 아니라 글 너머로 난 길을 깔지 않았기 때문이다.

둘을 가르는 시험

이 쓸모의 차이는 곧장 측정으로 드러난다. 같은 사람을 두고도 글귀를 그대로 떠올리는 회상 시험은 텍스트베이스만 비추고, 새 상황에 적용하거나 추론하게 하는 시험은 상황모델을 비춘다. 어느 쪽을 내느냐에 따라 한쪽만 보이고 다른 쪽은 가려진다.

가전제품 설명서를 통째로 외운 사람이 정작 그 기계를 앞에 두고는 조작하지 못하는 경우가 이 갈림의 본보기다. 설명서의 문장을 그대로 읊을 수 있으니 텍스트베이스는 단단히 섰다. 그러나 그 글귀들이 실제 기계의 어느 버튼, 어떤 순서에 대응하는지를 묶어 상황으로 세우지는 못했다. 상황모델이 안 선 것이다. 회상 시험을 내면 만점이고 조작을 시키면 0점인 이 사람을 두고, 회상만 본 사람은 "완벽히 이해했다"고 하고 조작을 본 사람은 "전혀 이해 못 했다"고 한다.

여는 글의 McNamara 실험이 잰 것이 정확히 이 갈림이었다. 빈틈 있는 글로 공부한 쪽과 매끄러운 글로 공부한 쪽은 회상 시험에서는 비슷했고, 추론·적용 시험에서만 갈렸다. 빈틈을 스스로 메우는 일이 상황모델은 키웠지만 텍스트베이스는 양쪽이 비슷했기 때문이다. 표면은 같고 깊이만 다른 그 상태가, 텍스트베이스는 같은데 상황모델이 다른 상태였던 것이다. 이해했다는 것은 글귀를 외운 상태가 아니라 글이 그리는 상황의 모델을 세운 상태이며, 그 둘은 무엇으로 재느냐에 따라 갈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