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장 · 한 표상의 두 가지 힘

지금 묵고 있는 호텔 방 번호와 집 주소는 둘 다 이 순간에는 똑같이 또렷하게 떠오른다. 떠오르는 정도만 보면 둘은 구별되지 않는다. 그런데 일주일 뒤를 생각하면 둘의 운명은 갈린다. 호텔 방 번호는 흔적도 없이 사라질 것이고, 집 주소는 그대로 있을 것이다. 지금 똑같이 떠오르는데 미래가 이렇게 다른 것은, 한 표상에 두 가지 독립된 힘이 함께 걸려 있기 때문이다.

지금 닿는 힘과 오래가는 힘

한 힘은 인출강도다. 지금 이 순간 그 표상에 얼마나 잘 닿는가를 가리킨다. 단서를 줬을 때 활성이 얼마나 빠르고 확실하게 그 표상으로 번지는가, 곧 지금 떠올리려 하면 얼마나 잘 떠오르는가다. 우리가 '안다는 느낌'으로 감지하는 것, 답이 혀끝에서 곧장 나오는지 더듬거리는지로 드러나는 것이 이 값이다. 호텔 방 번호와 집 주소가 지금 똑같이 떠오른다는 것은, 둘의 인출강도가 지금 똑같이 높다는 뜻이다.

다른 힘은 저장강도다. 그 표상이 관련 지식과 얼마나 깊이 엮여 있는가, 그래서 인출강도가 얼마나 느리게 떨어지고 다시 끌어올릴 때 얼마나 빨리 회복되는가를 정하는 값이다. 집 주소는 수없이 드나들며 온갖 기억과 엮여 깊이 박혀 있고, 호텔 방 번호는 오늘 한 번 본 것이라 어디에도 엮이지 않은 채 떠 있다. 둘의 저장강도는 천지 차이다. 그리고 바로 이 차이가 일주일 뒤의 갈림을 만든다. 저장강도가 높은 집 주소는 인출강도가 천천히 떨어져 일주일 뒤에도 남아 있고, 저장강도가 낮은 호텔 방 번호는 인출강도가 빠르게 떨어져 곧 닿지 못하게 된다.

두 힘의 결정적 차이는 이렇다. 지금 떠오르느냐 마느냐는 오직 인출강도가 정한다. 저장강도가 아무리 높아도 인출강도가 떨어져 있으면 지금은 떠오르지 않고, 저장강도가 낮아도 인출강도만 높으면 지금은 또렷이 떠오른다. 우리가 수행으로 보고 느낌으로 감지하는 것은 늘 인출강도 쪽이다. 저장강도는 그 자체로는 겉에 드러나지 않는다.

왜 둘을 따로 둬야 하는가

힘이 둘이라는 말이 군더더기처럼 들릴 수 있다. 떠오르면 아는 것이고 안 떠오르면 모르는 것이지, 굳이 두 개로 나눌 까닭이 있는가. 까닭은 미래에 있다. 지금 인출강도가 똑같은 두 표상이라도, 저장강도가 다르면 앞으로 잊는 속도와 다시 익히는 속도가 갈리기 때문이다.

두 힘은 한쪽이 바닥이어도 다른 쪽은 높을 수 있다. 한쪽 끝에는 이십 년 전 살던 집 전화번호가 있다. 지금 떠올리려 하면 좀처럼 나오지 않는다. 인출강도가 바닥인 것이다. 그런데 누가 그 번호를 한번 일러 주면, 처음 듣는 번호를 외울 때와는 비교가 안 되게 빨리 '아, 맞다' 하고 되살아난다. 인출강도는 바닥인데 저장강도는 아직 높이 남아 있는 상태다. 다른 쪽 끝에는 방금 외운 호텔 방 번호가 있다. 지금은 인출강도가 높아 또렷하지만, 며칠만 지나면 흔적 없이 사라지고 사라진 뒤엔 되살릴 단서조차 남지 않는다. 인출강도는 높은데 저장강도는 거의 없는 상태다.

이 두 경우가 한 가지 값만으로는 설명되지 않는다는 것이 핵심이다. 옛 전화번호와 갓 외운 호텔 번호 중 어느 쪽을 '더 잘 안다'고 해야 하는가. 지금 떠오르는 정도로는 호텔 번호가 위지만, 한 번의 단서로 되살아나는 정도로는 옛 번호가 압도한다. 두 잣대가 어긋나는 것은 둘이 서로 다른 두 힘을 재고 있기 때문이다. 하나로 합치면 이 어긋남을 담을 수 없다. 그래서 한 표상에 두 힘을 따로 둔다. 잊는 속도가 느리고 되살리기 쉽다는 뜻의 '잘 학습됨'과, 지금 당장 떠오른다는 뜻의 '잘 떠오름'은 다른 일이며, 학습으로 남는 쪽은 앞이다.

보이지 않는 힘을 읽는 법

저장강도에는 다루기 까다로운 성질이 하나 있다. 그 자체로는 결코 관찰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우리가 측정하고 느낄 수 있는 것은 인출강도뿐이다. 그것은 지금 떠오르는지, 얼마나 빨리 떠오르는지로 드러난다. 저장강도는 그 인출강도가 시간에 따라 어떻게 움직이는지를 통해서만 간접적으로 드러난다. 같은 망각 조건에서 인출강도가 천천히 떨어지면 '저 표상은 저장강도가 높구나'를 알고, 다시 익혔을 때 금세 높이 회복되면 또 '저장강도가 높구나'를 안다. 저장강도는 직접 보이는 양이 아니라, 인출강도의 거동에서 읽어 내는 숨은 변수다.

이 모델은 저장강도에 대해 한 가지를 더 가정한다. 한번 쌓인 저장강도는 줄어들지 않는다는 것이다. 인출강도는 오르내리지만, 저장강도는 올라가기만 하고 내려오지 않는다고 본다. 이것은 관찰로 입증된 사실이라기보다 모델이 세우는 공리에 가깝다. 머릿속을 들여다봐 저장강도가 영원함을 확인한 것이 아니라, 한번 깊이 배운 것은 오래 묵혀 다 잊은 듯해도 되살리기가 유난히 빠르더라는 거동을 저장강도가 사라지지 않았다고 보면 깔끔하게 설명할 수 있어 그렇게 둔 것이다. 이 공리를 받아들이면, 장기기억은 한번 제대로 적힌 것을 지우지 않는다. 다 잊었다고 느끼는 것조차 실은 닿는 길이 흐려졌을 뿐, 깊이 박힌 것은 그 자리에 남아 한 번의 단서를 기다린다.

여기까지 오면 '잊는다'는 말의 뜻을 다시 물어야 한다. 옛 전화번호가 지금 안 떠오르는 것은 그것이 장기기억에서 지워졌기 때문인가, 아니면 닿는 길이 막혔을 뿐인가. 한 번의 힌트에 되살아나는 것을 보면 지워진 것은 아닌 듯하다. 그렇다면 망각이란 정확히 무엇이며, 두 힘은 무언가를 떠올릴 때마다 어떻게 함께 움직이는가.